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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규 (고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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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규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장군, 어사중승 등을 역임했다. 임연의 사위였으나, 1270년 이분성을 통해 왕의 밀명을 받고 송송례와 함께 임유무를 주살하여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딸을 비구니로 만들었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충렬왕, 충선왕 대에 걸쳐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특히 충선왕의 장인이자 충숙왕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누렸다. 1316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시호는 광정이다.

2. 생애

1270년 (원종 11) 임유무를 제거한 공으로 우부승선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아첨꾼들과 함께 조정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사직했다.[3]

1272년(원종 13) 2월 추밀원부사로 복직되어 재추의 반열에 들었으나, 10월 다시 사직했다.[4][5] 이후 17년 동안 관직 없이 전원에서 지냈다.[1]

1288년(충렬왕 14) 원의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장녀를 비구니로 만든 죄로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소환되었다. 1291년(충렬왕 17)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6], 1295년(충렬왕 21) 9월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다시 한번 치사했다.[4]

1297년(충렬왕 23)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수사도(守司徒)·영경령궁사(領景靈宮事)가 더해졌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사위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4]

1310년(충선왕 2) 9월,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상호군(上護軍)이 더해지고 행한양부윤(行漢陽府尹)으로 나갔으며, 12월[8] 지익성군사(知益城郡事)로 옮겼다.

1313년(충숙왕 원년)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으로 고쳐 봉해지고 추성진력안정공신(推誠陳力安定功臣)의 호를 받았다. 1316년(충숙왕 3) 향년 75세로 졸했으며, 시호는 광정(匡定)이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권무(權務), 산원(散員), 견룡행수(牽龍行首)를 차례로 거쳤고[1], 원종 때 장군(將軍)·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일찍이 임연의 사위가 되었으나, 임연 사후인 1270년(원종 11) 5월[2] 이분성을 통해 왕의 밀명을 받고,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와 함께 임연의 아들인 임유무를 주살하여 무신정권 시대를 종식시켰다.

2. 2. 무신정권과의 관계

홍규는 임연의 사위였으나, 임연 사후인 1270년(원종 11년) 5월[2] 이분성을 통해 왕의 밀명을 받고,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와 함께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주살하여 무신정권 시대를 종식시켰다.

2. 3. 원나라와의 관계

1270년(원종 11) 8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원부(元傅), 송송례(宋松禮)와 함께 세자 왕심(王諶)을 호종해 원나라에 다녀왔다.[3]

1288년(충렬왕 14), 원나라의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장녀를 비구니로 만든 죄로 섬으로 유배되었고, 장녀는 결국 원나라 사신 아쿠타이(Aqutai)의 처가 되었다.[1]

1295년(충렬왕 21) 12월, 김광취(金光就)와 함께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 왔다.[7]

2. 4. 권력의 정점과 몰락

홍규는 일찍이 임연의 사위가 되었으나, 임연 사후인 1270년(원종 11) 5월[2] 이분성을 통해 왕의 밀명을 받고,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와 함께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주살하여 무신정권 시대를 종식시켰다.

1270년 8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원부, 송송례와 함께 세자 왕심을 호종해 원에 다녀왔으며, 12월 그 공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이듬해 아첨꾼들과 함께 조정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사직했다.[3]

1272년(원종 13) 2월, 추밀원부사로 복직되어 재추의 반열에 들었으나, 10월 다시 사직했다.[4][5] 이후 17년 동안 관직 없이 전원에서 지냈다.[1]

1288년(충렬왕 14), 원의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장녀를 비구니로 만든 죄로 섬으로 유배되었고, 장녀는 결국 원 사신 아쿠타이의 처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소환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한 번[6], 1295년(충렬왕 21) 9월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다시 한 번 치사(致仕)했다.[4]

1295년 12월, 김광취(金光就)와 함께 원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 왔으며, 이 무렵 홍규로 개명했다.[7]

1297년(충렬왕 23)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수사도(守司徒)·영경령궁사(領景靈宮事)가 더해졌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사위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4]

1310년(충선왕 2) 9월,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상호군(上護軍)이 더해지고 행한양부윤(行漢陽府尹)으로 나갔으며, 12월[8] 지익성군사(知益城郡事)로 옮겼다.

1313년(충숙왕 원년)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으로 고쳐 봉해지고 추성진력안정공신(推誠陳力安定功臣)의 호를 받았다. 1316년(충숙왕 3) 향년 75세로 졸했으며, 시호는 광정(匡定)이다.[1]

3. 가족 관계

홍규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째 부인에게서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 둘째 부인 광주 김씨에게서 1남 4녀를 두었다. 장남 홍융은 삼사사를 지냈고, 손자 홍언박1309년에 태어나 1363년에 사망했다.[9]

장녀는 원나라 좌승상 아쿠타이와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아쿠타이성종 사후 황위 계승 분쟁에서 패해 처형되었다. 차녀는 정해와 혼인하여 정책과 정이 형제를 낳았다.[9]

셋째 딸은 충선왕의 왕비 순화원비 홍씨이고, 넷째 딸은 원충과 혼인하여 원호, 원익, 원의와 네 딸을 두었다. 다섯째 딸은 충숙왕의 왕비 공원왕후로,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았다.[9]

3. 1. 가계

구 분내용
증조홍원중(洪源中)[1] (성불도감판관)
조부홍사윤(洪斯胤)[1] (추밀원사·공부상서)
아버지홍진(? ~ 1266년) (동지추밀원사·형부상서·한림학사승지)
어머니철원 최씨 최황(崔貺, 1208년 ~ 1229년)의 딸[9]
첫째 부인진천 임씨(鎭川 林氏) (상장군 임연(林衍, ? ~ 1270년)의 딸)
자녀 없음
둘째 부인광주 김씨(廣州 金氏) (참지정사 김련(金鍊, ? ~ 1278년)의 차녀)[9]
장남홍융(洪戒) (삼사사)
* 홍언박(洪彦博, 1309년 ~ 1363년)
장녀첫째 사위 아쿠타이(Aqutai, ? ~ 1307년) (원 좌승상, 성종 사후 황위 계승 분쟁에서 패해 처형)
자녀 없음
차녀둘째 사위 정해(鄭瑎, 1254년 ~ 1305년)[9] (도첨의찬성사, 장경공)
* 정책(鄭責)
* 정이(鄭怡)
삼녀셋째 사위 충선왕(忠宣王, 1275년 ~ 1325년)
자녀 없음
사녀넷째 사위 원충(元忠, 1290년 ~ 1337년)[9] (도첨의찬성사)
* 원호(元顥)
* 원익(元翊,元詡)
* 원의(元顗)
* 장녀
* 차녀
* 삼녀
* 사녀
* 오녀
오녀다섯째 사위 충숙왕(忠肅王, 1294년 ~ 1339년)
* 충혜왕
* 공민왕


참조

[1] 서적 홍규 묘지명
[2] 문서 본인의 묘지명에는 3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3] 문서 이 때 홍자번(洪子藩)이 그를 대신해 우부승선이 되었다.
[4] 서적 고려사
[5] 문서 이 때 변윤(邊胤)이 그를 대신해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6] 문서 본인의 묘지명에 의하면, 이 때 추충안사공신(推忠安社功臣)의 호도 받았다.
[7] 서적 고려사
[8] 서적 고려사 1312
[9] 서적 씨족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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